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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활동
일제는 만주를 침략할 목적으로 러일전쟁을 도발하였다
조약의 체결로 한국은 일제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한국정부를 식민지화 추진에 필요한 일제의 괴뢰정부로 전락시켰다

 

이에 안중근은 을사오조약 전후부터 부친과 의논해 나라를 구할 방도를 찾아 중국으로 갔다.
당시 상해와 청도ㆍ위해도 등지에는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었으므로 그곳에 항일운동의 국외 터전을 잡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몇 개월간에 걸친 중국 유력길에 상해에서 세대도샌이었던 민영익을 몇 차례 방문하였으나 만나지도 못하였으며, 상인 서상근과도
구국의 길을 논의하였으나 동의를 얻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상해 천주교 교회당에서 친면이 두터운 르각(Le Gac) 신부를 우연히 상봉해 그와 더불어 당면 구국방략을 논의하게 되었다.
안중근은 곽신부로부터 첫째 교육의 발달, 둘째 사회의 확장, 셋째 민심의 단합, 넷째 실력의 양성 등 네 가지 방략을 추진할 것을 권면받고
이에 동의 하여 1906년 초 서둘러 귀국하였다.

 

안중근이 국내로 돌아올 무렵, 그의 부친은 사전 약속대로 가족을 이끌고 신청 청계동을 떠나 교통의 요지인 진남포로 이사하던 중 병이
들어 객사하였으며 가족들은 할 수 없이 청계동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렀다.
안중근은 애통해 하며 청계동에서 그 해 겨울 제계를 지켜 모든 상례를 마쳤다.
이 즈음 그는 국권이 완전 회복될 때까지 즐기던 술도 끊기로 맹세하였다.

 

안중근은 이듬해인 1906년 3월 대가족을 이끌고 청계동을 떠나 삼화항이라 부르던 진남포로 이사해 용정동에 양옥 한 채를 마련해 집안을
안정시켰다. 진남포에서 안중근은 구국을 위한 교육사업에 투신하였다.
그해 4월에는 진남포 천주교 본당에서 운영하던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장에 취임하고 구국영재 교육기관으로 면목을 일신시켰다.
또한 6월에는 용정동에 삼흥(영어)학교를 새로 설립해 누대에 이어받은 가산을 기울여 영재교육에 헌신하였다.
그 결과 이듬해 7월에는 황해도와 평안남북도의 3개도 50여개 학교에서 총 5천여 명이 참여한 연합운동회에서 안중근이 운영하던 학교가
우등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안중근은 이 보다 앞서 빌렘 신부를 설득시키고, 함께 상경하여 뮈텔 주교에게 프랑스 수사회 등에서 박학한 선비 등을 초빙, 대학을 설립
하여 영재교육을 실시하도록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한 일도 있었다.
한편 안중근은 이 무렵 평양에서 ‘삽합의’라는 3인 합자의 석탄개발회사를 설립, 재정을 마련하고자 실업에도 종사하였다.
그러나 이 회사는 일본인의 방해로 큰 손해만 보고 문을 닫고 말았다.